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쑨원과 볼셰비키의 접촉 === 일찍이 쑨원은 1918년 여름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10월 혁명을 축하하며 중국과 러시아의 공동 투쟁을 원한다는 전보를 보내 레닌에게서 '동방의 광명'이라는 칭송을 받은 바가 있었다. 1920년 10월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난 [[아무르 주]] 중국부 서기 페도로프는 쑨원을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남방혁명운동의 영수'라고 고평가했다. 볼셰비키와 쑨원의 첫 접촉은 1920년 11월 [[천두슈]]의 소개로 중국공산당 창건을 위해 방중 중이던 보이틴스키가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 볼셰비키 혁명에 관해 설명해 준 것이었다. 이때 쑨원은 광동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볼셰비키와 접촉이 어려우니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파기지국에서 볼셰비키와 광저우 사이의 통신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보이틴스키는 중국 남부에서의 군사적 승리가 중국 중북부 지역의 혁명운동으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20년 10월 치체린이 쑨원에게 편지를 보냈고 쑨원은 1921년 8월 28일 볼셰비키와 연계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1920년 12월 제정 러시아 장군 출신의 포타포프[* 1903년에서 1년 간 [[주한러시아공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고 2월 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활동가졌다.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고 한다.]가 쑨원을 만난 후 치체린에게 "광열한 반영주의자인 쑨원은 중국 각지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으며 (...) 많은 자본가들이 그에게 물질적인 지지를 제공하고 있다. (...)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고 하고 있으며, 통일 후에는 선거를 통해 의회를 조직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부 서기 소콜로프는 쑨원의 기본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소개하며 상하이의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 쑨원의 초상화를 걸고 있음을 지적했고 볼셰비키 극동정책의 가장 긴박한 임무는 광저우 정부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 지적했다. 1921년 11월 최초의 공식 사절단 파이케스가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에 치체린은 쑨원보다는 북양정부와 협상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레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쑨원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속에 당신에 대한 문안도 있소. 그는 당신을 자신의 친구라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알고 있습니까? (...) 전에 우리가 쑨원에게 편지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우리가 그에게 편지를 쓴 것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베이징과의 담판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나 레닌은 쑨원과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치체린 동지: 나는 쑨원을 모르고, 우리는 서로 편지도 주고 받지 않았소. 내 생각에는, 가능한 한 열광적으로 대해주고,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아야 하지만 비밀리 진행하여야 하며, 우리의 사람을 광저우에 파견하는 것이 좋을 성 싶습니다.|| 이에 치체린은 파이케스에게 광저우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할 것을 지시하며 쑨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급히 전달하고 절대로 북양정부와의 관계 정상황에 영향을 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